"반 친구 25명 중 3~4명은 도박" 학교까지 파고들었다 [도박중독 237만 시대②]
아동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 정모(36)씨에게 도박은 생활의 일부다. 그는 “한참 빠져 있었던 2021년 5월엔 한 손으론 아기들 밥을 먹이고, 다른 한 손으론 스마트폰으로 도박을 하고 코인 시장을 봤다. 정말 심각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온라인 도박과 가상자산 코인 투자를 끊지 못해 1억 5000만원의 빚을 졌다. 2021년 9월에는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했다. 도박을 끊기 위해 퇴사까지 결심했지만, 그는 지금도 도박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박 시장 판도가 바뀌면서 중독자들의 중독 양상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국가가 공인한 강원랜드나 불법 도박 ‘하우스’ 등에서만 도박을 할 수 있었을 때와 달리, 상업지역 곳곳에 들어선 홀덤펍의 불법 영업이 성행하는 데다 모바일 불법 도박 확산세가 통제불능 상태라서다. 도박에 대한 접근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진 탓에 도박 중독도 ①생활화 ②집단화 ③복합화 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경기 시흥시의 한 제조회사 개발팀에 근무하던 윤모(40)씨는 불법 온라인 스포츠토토에 일상을 지배 당했다. 출근하자마자 당일 경기를 하는 팀의 전력을 분석하고, 업무 중 틈틈이 화장실에 가서 스마트폰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퇴근 후엔 경기 시작 10분 전까지 승·무·패, 최종 점수를 써넣는 데 혈안이 됐다.
월급과 생활비를 모두 탕진한 뒤에도 불법 도박을 멈추지 못 했다. 급기야 베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기가 없는 월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에 회사 창고에서 산업용 금속의 일종인 ‘팔라듐(전자회로 강도를 높이는 약품)’을 훔쳤다. 2018년 8월 시작된 그의 절도 행각은 2021년 5월에야 막을 내렸다. 상습절도 혐의로 구속기소된 윤씨는 지난해 4월 징역 2년 8개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 한때 성실한 회사원이었던 윤씨의 삶은 일상 속으로 파고든 도박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렀다.
시간을 쪼개 도박에 매달리는 윤씨 같은 생활도박 중독자들의 종착점은 ‘바카라’라는 게 중독자들의 증언이다. 베팅과 승부 결정이 초단시간에 이뤄지는 ‘바카라’의 속성 때문이다. 강릉에 사는 회사원 신모(28)씨는 “여러 도박을 하다 가장 단순하고 즉각적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바카라에 정착했다”고 했다. 경찰청 사이버도박 발생 유형에 따르면 바카라 등 카지노 게임의 비중이 2018년 5.84%에서 2023년 10월까지 10.33%으로 늘었다. 책 ‘어쩌다 도박’의 저자인 신영철 서울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바카라는 승부가 빨리 나 뇌에 보상 자극이 빨리빨리 주어지기 때문에 중독되기 쉽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이 청소년 층에도 일반적으로 보급되면서 불법 도박의 진입장벽이 현저히 낮아진 데다 또래끼리 도박을 권하기도 쉬워졌다는 것도 최근 불법 도박 확산의 양상으로 거론된다. 수원에 사는 고교생 박정찬(17·가명)군은 반 친구들의 권유에 지난 3월 온라인 바카라 사이트에 가입했다. 정찬군의 동생(15)도 “어렸을 때 형한테 쥬니버(쥬니어네이버)를 배웠던 것처럼 형이랑 친구들이 하는 게임이니까”라며 거부감 없이 불법 도박 사이트에 가입했다.
정찬군은 “반 친구 25명 중에 안 하는 애가 한둘 뿐”이라며 “나는 300만원 잃고 동생은 500만원 땄다”고 억울해했다. 박군의 아버지는 “우리 아이들이 설마 도박을 할 거라 상상도 못 했다”며 “청소년 도박 문제는 일부 비행 청소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 보편적인 놀이가 된 것”이라고 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4월 전국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약 88만명을 대상으로 사이버 도박 진단 조사를 한 결과 도박 위험군으로 분류된 청소년은 2만8838명(3.2%)으로 집계됐다. 서울의 한 중학교 다니는 임모(14)군은 “25명 남짓 급우들 중 일상적으로 도박을 즐기는 친구들이 3~4명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속에 적발되는 수는 미미하다. 전국 시·도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의 청소년 유인 요소를 활용한 온라인 도박 특별단속(9월 25일~11월 10일)에선 39명(전체 수사 대상자 353명)의 청소년이 적발됐다.
비슷한 일은 군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군 검찰에 형사 입건된 휴대전화 관련 범죄 사건 중 도박 관련 범죄는 2017년 49명에서 지난해에 243명으로 늘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생, 군인처럼 집단생활을 하는 경우 누구 한 명이 ‘도박으로 큰돈 땄다’는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 따라 하고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그렇게 또래 집단을 통해 처음 도박을 시작해 중독에 빠지는 피해가 막심하다”고 설명했다.
합법도박과 불법도박을 넘나들거나 주식 등 자산시장까지 도박판의 한 종류로 인식하는 ‘복합화’도 최근 도박 중독의 특징이다. 전업 투자자인 이모(43)씨는 2010년 1월 1일 강원랜드에 처음 방문한 뒤 두 달 만에 타고 갔던 승용차까지 2번이나 전당포에 맡기는 등 도박에 중독됐다. 그는 “20대 후반 건설회사 토목 설계 직원으로 한 달에 270만원을 벌다 강원랜드에서 한 판에 500만원짜리 바카라로 돈을 잃고 난 뒤 도박에 심취했다”며 “내 월급의 2배 되는 돈이 있었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생기는데, 어떻게 몇 백만원 월급에 만족하며 살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내 불법 온라인 도박에 손을 댄 이씨는 최근 주식, 선물·옵션, 가상화폐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이씨는 “큰 돈을 잃고 따는 순간 폭발하는 도파민(쾌락을 느끼게 하는 중추신경계 신경전달물질) 때문에 돈을 걸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박판으로 여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난 도박을 할 수밖에 없는 팔자”라며 “기존 도박뿐만 아니라 주식, 코인 다 불확실한 미래에 인생을 베팅하는 도박”이라고 말했다.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역시 가상화폐·주식 단타 거래 등이 도박 수단으로 취급될 수 있다고 보고 관련 상담을 진행 중이다. 주식을 이용한 도박중독 상담자 수는 2018년 421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1823명으로 크게 상승했다. 중독 치료 전문인 하주원 연세숲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 근로소득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소비 수준을 누리기 힘들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도박 중독에 빠져드는 계층이 광범위해졌다”며 “주식과 코인도 순식간에 큰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도박이 될 수 있다. 도박이 아니라 투자를 하다 실패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워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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